들어가며
같은 조직 안에서 일해도, 막상 서로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프로덕트 조직처럼 다루는 영역이 넓고 팀이 다양한 환경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각자 바쁘게 일하다 보면 이름은 알지만 대화해본 적은 없는 동료, 슬랙에서는 자주 보지만 실제로는 마주칠 일이 없는 동료가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CJ올리브영 프로덕트센터의 PM 커뮤니티인 올리프(OLIVE YOUNG Product Community)에서 만든 올리프 랜덤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 문화입니다. 이 글에서는 올리프 랜덤밥이 왜 시작됐는지, 어떤 문화로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실제 참여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이야기합니다.
💡 올리프 랜덤밥: 프로덕트센터 구성원들이 랜덤 또는 테마 기반으로 조를 이뤄 함께 점심을 먹는 교류 프로그램입니다. 형식적인 네트워킹보다 더 자연스럽고, 의무적인 행사보다 더 편안하게 서로를 알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왜 시작했을까
프로덕트 조직은 같은 목표를 향해 일하지만, 실제 업무 현장에서는 팀별로 다루는 도메인과 과제가 다르고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도 한정되기 쉽습니다. 특히 프로덕트, 디자인, 데이터, 글로벌, 리테일, 커머스, 코어 등 다양한 영역이 동시에 움직이는 환경에서는 같은 조직 안에 있어도 서로를 잘 모른 채 지나가기 쉽습니다.
올리프 랜덤밥은 이런 간격을 줄이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업무 협업이 생기기 전에 먼저 사람을 알고, 회의실 밖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같은 조직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를 발견하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서로 가까워질수록 협업의 문턱은 낮아지고, 더 좋은 제품과 더 좋은 의사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이 프로그램의 출발점입니다.
사실 조직이 커질수록 이런 간격은 자연스럽게 벌어집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소통 빈도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처럼, 좌석과 팀이 나뉘면 접점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랜덤밥은 이렇게 벌어진 팀 사이의 빈틈을 회차마다 다른 사람으로 잇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 조직이 커지면 왜 저절로 멀어질까
사람이 늘수록 관계가 옅어지는 현상은 조직 연구에서 오래 다뤄온 주제입니다. 랜덤밥이 다루려는 문제를 설명해주는 개념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 앨런 커브(Allen Curve)
MIT의 토머스 앨런(Thomas J. Allen) 교수가 1977년 저서에서 정리한 곡선입니다. 자리 사이의 거리와 소통 빈도를 함께 측정했더니,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화 횟수가 가파르게 줄었고 일정 거리를 넘어서면 거의 0에 가까워졌습니다. 접점이 사라지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 구조적 공백(Structural Holes)
사회학자 로널드 버트(Ronald S. Burt)가 1992년 제시한 개념으로, 서로 연결되지 않은 집단 사이의 빈틈을 가리킵니다. 이 빈틈을 건너 양쪽을 잇는 사람은 남들보다 정보와 기회를 먼저 접합니다. 랜덤밥은 그 역할을 특정인에게 고정하지 않고, 회차마다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어떤 프로그램인가
올리프 랜덤밥은 소규모 조 편성, 식사 지원, 후기 공유라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AI를 활용해 이전 회차와 중복되지 않도록 조를 랜덤 매칭하고, 조장은 회차별로 돌아가며 맡도록 운영합니다. 조 편성은 회차마다 매칭 기준과 테마를 다르게 해서, 각자 평소 접점이 적었던 사람들과 식사하며 일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주요 특징을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업무 중심 조직 안에 관계 중심의 순간을 만듭니다. 둘째,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반복 운영되는 프로그램입니다. 2025년 PM들이 모이는 밍글(친목 교류) 형태로 시작해, 2026년에는 프로덕트센터 구성원 100여 명이 20여 개 조로 나뉘어 참여하는 규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운영 주기도 분기 단위에서 월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셋째, 구성원이 늘수록 벌어지는 간격을 조직이 스스로 메웁니다. 올리브영에는 HR 조직이 운영하는 온보딩 프로그램도 있고 여러 조직에서 밍글링 이벤트도 열리지만, 랜덤밥은 그와 별개로 프로덕트센터가 직접 기획하고 운영합니다.
회차마다 적용한 매칭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후기 시상, 선착순 미션 같은 게임형 장치를 더해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 유형 | 매칭 기준 | 의도 |
|---|---|---|
| 리커넥트형 | 워크숍에서 함께했던 팀원 | 이미 만난 사이를 다시 연결합니다 |
| 공통성향형 | MBTI 등 성향 유형 | 성향의 공통점을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
| AI 랜덤 조합형 | AI 무작위 조합 |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을 만듭니다 |
참여자들의 후기
참여자들이 남긴 후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성원들은 단순히 "재밌었다"를 넘어, 관계와 협업, 조직 이해 측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경험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후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반응들은 이 프로그램이 단순 친목 프로그램이 아니라, 조직 안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만드는 장치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무엇이 달라졌나
참여자들이 말한 변화를 조직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협업의 문턱을 낮춥니다
협업은 프로세스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한 번이라도 편하게 대화해본 경험이 있으면 모르는 것을 묻거나 도움을 청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랜덤밥은 서로를 알아가는 첫 접점을 만들고, 이후 업무에서도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
사회학자 마크 그래노베터(Mark Granovetter)가 1973년 발표한 연구입니다. 새로운 정보와 기회는 매일 붙어 있는 강한 연결이 아니라 느슨한 연결에서 온다는 내용입니다. 랜덤밥은 이 약한 연결을 우연에 맡기지 않고 의도적으로 만드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팀 간의 벽을 낮춥니다
프로덕트 조직은 도메인별 전문성이 강한 만큼 팀 간 업무와 고민을 서로 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랜덤밥에서 서로 어떤 제품을 담당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게 되면, 내가 속한 팀을 넘어 조직 전체의 업무와 맥락을 이해하게 됩니다.
3. 심리적 안전감을 높입니다
이름만 알던 동료가 얼굴을 익히고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되면, 조직은 조금 더 편안한 공간이 됩니다. 아는 얼굴이 늘수록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의견을 내기가 덜 부담스러워지고, 자연스럽게 더 적극적이고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
조직행동 연구자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이 1999년 제시한 개념으로, 심리적 안전감을 "대인관계에서 위험을 감수해도 안전하다고 팀이 공유하는 믿음"으로 정의합니다.
4. 온보딩과 적응에 도움이 됩니다
입사 초기 구성원들이 조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여럿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팀의 사람들을 만나고, 각자의 역할과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합류한 사람에게 랜덤밥은 프로덕트센터가 어떤 조직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경험 중 하나가 됩니다.
5. 소속감과 자부심을 만듭니다
랜덤밥은 서로 다른 팀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에게 결국 하나의 조직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는 연결감을 만듭니다. 다양한 동료들의 경험과 열정을 직접 접하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조직 전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름은 알지만 대화해본 적 없던 동료와 한 끼를 같이 먹는 일. 올리프 랜덤밥은 그 한 끼를 회차마다 다른 조합으로 2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좋은 조직문화는 슬로건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체감하는 경험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올리프는 앞으로도 구성원들이 서로 만날 자리를 계속 만들어가려 합니다. 좋은 제품은 좋은 협업에서 나오고, 좋은 협업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